서화를 모두 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블로그에 담기에는 꽤나 길더군요.
헌데, 마음 속에 남는 여운은 훨씬 더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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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천하무인 (天下無人)
세상엔 남이 없습니다.
네 이웃 보기를 네 몸 같이 하라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근대사는 사람간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야심성유휘 (夜深星逾輝)
이것은 밤하늘의 이야기인 동시에,
어둔 밤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 입니다.
지남철 ( 指南鐵 )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떠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잊은 게 아니라
우리는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바늘이 한곳에 멈춰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지남철이 아닙니다.
나무의 나이테
나무는 겨울에도 자랍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이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단단합니다.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훈도(薰陶)의 가마
아름다운 도자기가 익고 있는 가마의 아궁이 앞에 앉아서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을 저마다의 훌륭한 예술품으로
훈도해줄 커다란 가마를 생각합니다.
물(水)
만물을 이롭게 하며,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며, 다투지 않기에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마음을 비우고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
결코 무리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봄이 오는 곳
봄이 가장 먼저 오는 곳은 사람들이 가꾸는 꽃들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들판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은 꽃이 아니라
이름없는 잡초라는 사실이 더욱 놀랍습니다.
나비의 역사
작은 알에서 시작해
한 점 공간을 우주로 삼고 소중히 생명을 간직해왔던,
고독과 적막의 밤을 이기고 징그러운 번데기의 모습을 해도
한시도 자신의 성장을 멈추지 않으며 각고의 시절을 이겨낸 나비.
비록 연약한 한 마리의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비는 우람한 승리의 화신으로 다가옵니다.
사제 (師弟)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갑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연쇄 속에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과 증오
증오는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을 수반하지만
증오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하지 않으므로 피차의 입장차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 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위치
나의 아픔이 세상의 수많은 아픔의 한 조각임을 깨닫고
나의 기쁨이 누군가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가을의 심판
여름 내내 청산을 이루던 나무들도 가을이 되면 각기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단풍 드는 나무, 낙엽 지는 나무, 끝까지 녹색을 고집하는 나무…
바람이 눕는 풀과 곧은 풀을 나누듯
가을은 그가 거느린 추상으로 나무를
나누는 심판의 계절입니다.
목수의 집 그림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와 달리
먼저 주춧돌을 그린 후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을 맨 마지막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탁度 과 족足
차치리 라는 사람이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해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그 본을 度(탁)이라 합니다. 그러나 막상 시장에 갈 때는 깜빡 잊고
탁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에 다시 갔다 시장에 왔을 때는 이미 장이 파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 사연을 들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발로 신어보면 될 것을..."
차치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탁 만큼 정확하겠습니까?"
탁과 족, 의상과 사람,이론과 실현들이 뒤바뀐 우리들의 생각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게 하였습니다.
높이 나는 새는 뼈를 가볍게 합니다.
높이 나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을 것을 버립니다.
심지어 뼈 속까지 비워야 합니다.
무심히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가
가르치는 이야기 입니다.
성찰 ( 省察 )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켜 아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절반과 동반
피아노의 건반은 우리에게 반음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동반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과 반의 여백에 있습니다.
‘절반의 비탄’은 절반의 환희이며
‘절반의 패배’는 ‘절반의 승리’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절제 할 수 만 있다면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의 언어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지위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겨울은 별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겨울은 별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모든 잎사귀를 떨구고 삭풍 속에 서있는 나목처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계절입니다.
한 해를 돌이켜보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내년 봄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겨울 밤 나목 밑에 서서
나목의 가지 끝에 잎 대신 별을 달아봅니다.
옥창의 풀씨 한 알
우리 방 창 문턱에
개미가 물어다 놓았는지
풀씨 한 알 싹이 나더니
어느새 한 뼘도 넘는 키를 흔들며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얇은 노트
깨끗하게 필기하지 못한 노트의 앞쪽을 뜯어내면
그만큼의 노트 쪽이 뒷부분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어린 시절엔 노트의 첫 장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땐
뜯어 내고 다시 쓰기 일쑤였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떨어져 나갈 새 노트 쪽이 아까워서도 뜯어내지 못하고,
글씨에 담긴 수고가 아까워서도 차마 뜯어내지 못합니다.
결백하나 얇은 노트보다는 깨끗하지 못하더라고
두툼한 노트에 애착이 갑니다.
더 큰 아픔
밤새 언 비닐 창문이 희미하게 밝아 올 즘, 방 안 전등불과 바깥의 새벽빛이
서로 밝음을 다투는 짤막한 시간이 있습니다.
이때는 그럴 리 없지만 더 어두워지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철야의 어둠이 평단의 새 빛에 물러서는 이 짧은 시간마다 나는 별이 태양 앞에
빛을 잃고, 간밤의 어지럽던 꿈이 찬물 가득한 아침 세숫대야에 씻겨 나가듯이
작은 고통들에 마음 아파하는 부끄러운 자신을 청산하고
더 큰 아픔에 눈뜨고자 생각에 잠겨봅니다.
안개꽃
아무리 절절한 애정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반대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입니다.
사랑의 방법을 한 가지로 한정하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함께 걸어가는 것’ 입니다.
‘장미’가 아니라 함께 핀 안개 꽃입니다.
너른 마당
너른 마당이란 대문이 열려 있는 마당입니다.
대문이 열려 있으면 마당과 골목이 연결됩니다.
그만큼 넓어집니다.
그러나 열린 마당은 공간의 의미를 넘어서 소통과 만남의 장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산천의 봄, 세상의 봄
산천의 봄은 흙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옵니다.
얼음이 박힌 흙 살을 헤치고 제 힘으로 일어서는 들풀들의 합창 속에서 옵니다.
세상의 봄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박힌 불신이 사라지고
갇혀있던 역량들이 해방될 때 세상의 봄은 옵니다.
산천의 봄과 마찬가지로 무성한 들풀들의 아우성 속에서 옵니다.
모든 것을 넉넉히 포용하면서 어김없이 옵니다.
가장 먼 여행
The longest journey for anyone of us is from head to heart.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Another longest one is from heart to feet.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도인 (挑仁)
가운데 씨가 박혀 있어서 좀처럼 쪼개질 것 같지 않은 복숭아도
열 손가락 잘 정돈해서 나누어 쥐고 단호하게 힘을 주면
짝- 하고 정확하게 절반으로 쪼개지면서 가슴을 내보입니다.
‘heart’ 가슴에 도인을 안은 사랑의 마크가 선명합니다.
백련강 (百鍊剛)
좋은 쇠는 뜨거운 화로에서 백 번 단련된 다음에 나오는 법이며
매화는 추운 고통을 겪은 다음에 맑은 향기를 발하는 법이다.
역경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글귀입니다.
감옥을 홍로처럼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공간으로 삼고
무기징역형을 한고 속의 매화처럼
청향을 예비하는 시절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감옥에서 붓글씨로 자주 쓰던 글귀입니다.
돌이켜보면 감옥은 나의 경우, 대학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와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준 ‘나의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태산일출을 기다리며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끝내고
옆에다 태산일출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그림 속의 해를 지웠습니다.
물론 일출을 그려 넣는 일은
당신에게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곤경에서 배우고, 어둔 밤을 지키며,
새로운 태양을 띄워 올리는 일은
새로운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얼굴
함께 오래 살다 보면
어느덧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는 사실, 여럿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개인의 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당연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닮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한 포기 미나리아재비나 보잘것없는 개똥벌레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열린 사랑’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 그루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또 하나의 손
등에는 아기를 업고, 양손에는 물건을 들고, 머리에는 임을 이고
그리고 치맛자락에 아이를 달고 걸어가는 시골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걸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일이었습니다.
등의 아기는 띠로 동였고, 양손의 물건은 손으로 쥐고 있어서 땅에 떨어질 염려는
없었습니다만 머리 위의 임은 떨어질 듯 흔들려 어린 나를 내내 불안하게 했습니다.
‘저 아주머니에게 손이 하나 더 있었다면,,,,,’
어린 아이였던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소망의 최고치였습니다.
그 뒤 훨씬 철이 든 후에도 가끔 ‘ 또 하나의 손’을 생각하는 버릇을 갖고 있습니다.
짐이 여러 개일 때나 일손이 달릴 때 자주 그런 상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릴 때의 간절한 손이 짐을 들어주는 손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손이기를 바랍니다.
다정한 ‘악수’이길 바랍니다.
일몰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는 마음이
지성(知性)입니다.
곡즉전 (曲則全)
굽이 굽이 에돌아가는 길은 더디지만 정다운 길입니다.
산천을 벗 삼고 가는 길입니다.
생명을 다치게 하지 않는 살림의 질서입니다.
꽃과 나비
“꽃과 나비는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게 가라지 않느냐.”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돌아가신 분이 있습니다.
한솥밥
대문을 열어 놓고 두레상에 둘러 않아
한솥밥을 나누는 정경은
지금은 사라진 옛 그림 입니다.
솥도 없고 아궁이도 없습니다.
더구나 두레상이 없습니다.
봄꽃
언덕에 봄 꽃을 피우고 있는 섬진강도 강물을 타고 오르는 한기가
아픈 추억과 함께 전율처럼 가슴을 엡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는 동시에 자신의 추억을 돌이켜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봄 꽃 한 송이를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가져야 합니다.
하물며 삐뚤어진 우리들의 삶을 바로잡는 일 없이 세상의
진정한 봄을 맞이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에 대한 과거의 위력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의미를 증폭시킴으로써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의 토끼가 주의해야 할 일
히말라야의 높은 산에 살고 있는 토끼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기가 평지에 살고 있는 코끼리보다 크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리수
우리는 어린 손자의 모습에서 문득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계승되고 있음을
깨닫기도 하고, 사제 붕우와 같은 인간 관계를 통해서도 우리 존재가 서로
윤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나의 존재는 누군가의 생으로 이어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를테면 존재의 윤회가 아니라 관계의 윤회입니다.
자녀에게, 벗에게 그리고 후인들에게 좀더 나은 세상으로 윤회되기를 원하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 의미의 윤회를 불가에서 윤회라 부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나의 생각을 윤회라는 그릇에 담아보면 그런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콜럼버스의 달걀
콜럼버스의 달걀은 발상전환의 전형적인 일화입니다.
발상의 전환 없이는 결코 경쟁에 이길 수 없다는 신 자유주의의 메시지로
오늘날도 변함없이 예찬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했지만 콜럼버스는 달걀의 모서리를
깨트림으로 쉽게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상전환의 창조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서슴지 않고
깨트릴 수 있는 비정한 폭력성이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달걀을 깨트릴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후, 대륙엔 무수한 생명이 깨트려지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그 소리는 콜럼버스의 달걀로부터 오늘날 이라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인간주의
새로운 인간주의는
자연으로부터의 독립도 아니며,
궁핍으로부터의 독립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쌓아 놓은 권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며,
무한한 욕망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추픽추
숲이 되지 못하고 황량한 폐허로 남아 있는
마추픽추 산정은 비극의 절정입니다.
이곳만큼 떠나는 것의 비극성이 사무치게 배어 있는 땅도 없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떠나는 것은 낙엽뿐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잎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낙엽이 아닌 모든 소멸은 슬픔입니다.
연 초록 솔잎
연 초록 봄빛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양지의 풀밭이나 버들가지가 아니라
무심히 지나쳐 버리던 솔잎이었습니다.
꼿꼿이 선채로 겨울과 싸워온 소나무 잎새에
가장 먼저 봄빛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만 잊고 있었을 뿐,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호색
애벌레를 먹는 소조들은 애벌레가 눈에 띄이기만 하면 재빨리 쪼아먹습니다.
그러나 소조가 애벌레를 보는 순간 공포를 느끼거나 과거에 혼찌검이 난 경험이
연상되면, 일순 주저하게 됩니다.
이 일순의 주저가 애벌레로 하여금 살아남을 기회를 제공합니다.
자신을 보호할 어떤 수단도 없는 애벌레들은 오히려 소조를 잡아먹는
포식자의 눈을 연상시키는 ‘안상문’을 등허리의 엉뚱한 곳에 그려넣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궁리해 낸 애벌레의 기만,도용,기탁의 속임수가 비열해 보이기
보다는
과연 살아가는 일의 진지함을 깨닫게 합니다.
기다림
기다림은 더 먼 곳을 바라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찔레 꽃잎 따먹으며
엄마를 기다려본 사람은 압니다.
기억 속의 기차소리
키 작은 코스모스와 먼 곳으로 뻗어나간 철길을 바라보며 키우던
그리움이 생각납니다.
간이역의 그리움은 밤열차 소리와 함께 힘겨운 삶을 견디게 하는
추억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물질적 풍요와도 바꿀 수 없는 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대와 TV
무대와 무대 위의 연극은
그것이 아무리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고 하더라고
삶의 현장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연극이 끝난 후, 극장의 가상 공간에서 저마다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오면
그 달구어진 열기가 냉각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연극의 한계이며 무대의 환입니다.
TV는 무대보다 작고 무대는 삶의 현장엔 미치지 못합니다.
속도는 가속으로 가속은 질주로 이어집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미터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 길이 됩니다.
자유
자유는 자기의 이유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여행
여행은 떠남과 만남입니다.
떠난 다는 것은 자기의 성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며,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대상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은 떠나는 것도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여행은 돌아옴입니다.
자기자신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빈손
물건을 갖고 있는 손은 손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손은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빈손이 일손입니다. 그리고 돕는 손입니다.
그리움
미술 시간에 어머니 얼굴을 그린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그 친구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림은 ‘그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 뿐입니다.
샘터 찬물
어지러운 꿈을 헹구어 새벽 맑은 정신을 깨우는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야 합니다.
가까운 곳에 두고 자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잠재우는 수많은 최면의 문화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NO MONEY NO PROBLEM
갠지스 강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NO MONEY NO PROBLEM”
나는 그가 던진 만트라에 화답하였습니다.
“NO PROBLEM NO SPIRIT”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쌓아
불멸과 영생을 도모하였듯이,
오늘의 우리들 역시
저마다의 피라미드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 쌓은 것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한없이 충실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피라미드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킬리만자로의 정상 부근에서 얼어 죽은 표범은
아프리카의 대각점 (大角點) 에 있는
유럽 문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럽의 도시 문명은 사슴이나 얼룩말 같은
초식동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이들을 먹이로 삼는
표범으로 살아왔음이 사실이며,
그러한 문명이 지속 가능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관해난수 (觀海難水)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합니다.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법 입니다.
집의 크기
바둑에서는 집이 크면 이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크기를 측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람과 집의 크기를 비교하는 까닭은 짐작이 갑니다.
비슷해야 하는 것은 사람과 집의 크기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의 크기도 비슷해야 합니다.
의상도 마찬가지 입니다.
뒤돌아보라
길을 걷다가
골목이 꺾이는 길모퉁이 같은 데서
재빨리 뒤돌아보라.
거기, 당신의 등 뒤에
당신을 지켜주는 손이 있다.
어머니의 손 같은, 친구의 손 같은………….
새끼가 무엇인지
미루나무 가지 끝에 새봄이 왔습니다.
새끼를 먹이느라 어미 새가
쉴 틈이 없습니다.
새끼가 무엇인지?
어미가 무엇인지?
아마 새끼는 어미 새의 새봄인가 봅니다.
와우 (臥牛)
꿇어앉은 소가 밤새 씹고 있는 것은
칠흑 같은 외로움인지도 모릅니다.
끊을 수 없는 질긴 슬픔인지도 모릅니다.
삶
사람은 삶의 준말입니다.
‘사람’의 분자와 분모를 약분하면 ‘삶’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아픈 상처도 사람이 남기고 가며
가장 큰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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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z의 느낌
FROM keizie's me2DAY 2008/06/20 03:47 삭제관해난수,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합니다.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법 입니다. - 흔히 잘 아는 것일수록 확고한 견해를 가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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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icultural engineering education requirements.
FROM Sc agricultural education magazine. 2009/01/06 18:15 삭제Journal of agricultural education. Importance of agricultural education. Agricultural education webquests.






높이 나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정말 마음에 와 닿습니다. 뭘 버릴 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 것이 당장 마주한 현실이긴 하지만요.